시가 속의 명루(名樓)

From:금교Author: 2024-07-15 10:48

  시는 누각에서 태어나고 누각은 시 덕분에 이름이 난다. 황학루(黃鶴樓), 악양루(岳陽樓), 등왕각(滕王閣), 관작루(鸛雀樓) 등 누각들은 모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명작들로 인해 만고에 이름을 남겼다. 역사의 연기와 운무가 점차 사라졌지만, 유명한 누각들의 문화적 유산은 더욱 빛나고 있다.

  유유한 동정호(洞庭湖), 천고의 악양루

  악양루는 후난성 웨양시의 웨양러우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아래는 동정호이고 앞에는 군산(君山)이 있으며 예로부터 ‘동정천하수, 악양천하루(洞庭天下水,岳陽天下樓)’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다.

  중국 삼국시대인 220년에 오(吳)나라의 장군 노숙(魯肅)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당시 이름은 ‘열군루(阅軍樓)’였다. 이후 파괴되어 당(唐)나라 때 재건돼 ‘파릉성루(巴陵城樓)’라는 이름으로 당시에는 파릉현 서쪽의 성루였다. 그 후 ‘악양루’라는 이름이 정식으로 정해졌다. 그렇다면 악양루는 어떻게 ‘강남[江南, 창장(長江) 이남 지역] 3대 명루’ 중 하나가 되었을까? 이는 세 명의 시인이 이를 위해 쓴 시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먼저 악양루는 시선(詩仙) 이백(李白)의 시 <여하십이등악양루(與夏十二登岳陽樓)>로 붙여진 이름이다. “악양루에 올라 사방 경치 둘러보니, 강물은 아득히 탁 트인 동정호로 흐르네. 기러기는 내 맘 속 근심 끌고 날아가고, 산은 밝은 달 머금고 다가서네.”라는 시다. 지금 악양루에 가보면 ‘수천일색, 풍월무변(水天一色,風月無邊)’이라는 대련(對聯, 문이나 기둥에 써 붙이는 문구)이 보이는데 그것도 이백이 누각에 오를 때 지은 시구다.

  그러나 악양루가 유명해진 것은 또 다른 시인 두보(杜甫) 덕분이었다. 서기 768년, 두보가 악양에 왔다. 그는 나라의 동란으로 가난하고 질병에 시달리며 가족들과 작은 배에서 살았다. 그가 악양루에 올라 아득한 동정호를 보면서 절로 정겹게 느껴 <등악양루(登岳陽樓)>라는 시를 지었다. “옛날에 동정호를 말로만 듣다가, 오늘에야 악양루에 오르는구나. 오나라와 초나라가 동남쪽에 갈라졌고, 하늘과 땅이 밤낮으로 떠있구나. 가까운 친구의 편지도 없으니, 늙어감에 외로운 배뿐이로다. 싸움터의 말이 관산 북쪽에 있으니, 난간에 의지해 눈물을 흘리노라.”

  그러나 정작 악양루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리게 한 사람은 북송(北宋)의 유명한 시인 범중엄(范仲淹)이었다. 그가 쓴 <악양루기(岳陽樓記)>는 중국 문단의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 되었고, 그 중 ‘사물의 득실과 자기의 승진이나 강등 때문에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不以物喜,不以己悲)’, ‘고생스러운 일에는 자기가 앞장서고 즐거운 일에는 남보다 뒤에 선다(先天下之忧而忧,後天下之樂而樂)’라는 구절이 귀에 익은 천고의 명구가 되었으며 악양루도 이로 인해 천고의 명루가 되었다.

  찬란한 황하(黃河)의 보물-관작루

  관작루는 지금의 산시성 융지시에 위치하고 있다. 북주(北周) 시대에 대신 우문호(宇文護)는 포주를 지키기 위해 포주의 서쪽, 황하의 동쪽 기슭에 망루를 세웠다. 건물을 지은 후 그는

  주변 시야가 매우 넓고 아름답다는 것을 발견했고, 꼭대기 층에 올

  라가면 천하가 조그맣게 보이는 느낌이 든다고 하여 ‘운서루(雲棲

  樓)’라는 이름을 붙였다.

  나중에 또 황하 유역에 황새와 같은 긴 부리와 다리, 회백색 깃털을 가진 새가 종종 이 망루에 서식하기 때문에 ‘관작루’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서기 1222년, 원(元)나라 광원(光元) 년간에 몽고인들은 포주를 함락시켰다. 금군(金軍)의 수비 수장인 후소숙(侯小叔)은 관작루와 그 주변의 모든 부교 등 군사시설을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명(明)나라 때 황하가 범람하여 관작루의 옛 터가 물에 잠기고 지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관작루가 존속하는 동안 웅장한 외관, 기발한 구조, 우세한 위치, 수려한 풍경으로 인해 당나라와 송(宋)나라의 문인 학자들이 관작루에 올라 경치를 감상하고 많은 유명한 시를 남겼는데, 그 중 왕지환(王之渙)의 <등관작루(登鸛雀樓)>는 천고의 절창이다. “석양은 서산을 가까이 하며 천천히 사라져 가고, 도도한 황하는 동해로 세차게 흘러가네. 천리의 풍경을 다 보고 싶으면, 더 높은 한층의 성루에 올라가야만 하네.”라는 시다.

  1992년 9월, 중국내 거의 100명의 전문가와 학자들이 관작루를 재건할 것을 공동으로 제안했다. 중수된 관작루는 진난(晉南, 산시성 남쪽) 지역의 황하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건물에 오르면 아름다운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왼쪽에는 우뚝 솟은 중조산(中條山)이 웅장하고, 오른쪽에는 광야가 평평하고 넓으며, 먼 곳에는 황하가 완만하고 묵묵히 흐르고 있다. 이 광경은 사람들로 하여금 황홀하게 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게 하고 ‘천리의 풍경을 다 보고 싶으면, 더 높은 한층의 성루에 올라가야만 하네’라는 시구에서 품은 창망하고 두터운 분위기를 음미하게 한다.

  천하강산 제1루-황학루

  황학루는 후베이성 우한시 우창구의 창장 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사산(蛇山) 꼭대기에 건설되었으며 아래는 광활한 만리장장에 인접하여 누각에 올라 조망하며 아름다운 주변 경치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독특한 지리적 위치와 함께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시, 문부, 영련, 현판, 마암각, 민담으로 인해 황학루는 산천과 인문경관을 서로 의지하는 문화의 명루로 ‘천하절경’과 ‘천하강산 제1루’라는 명성을 누리고 있다.

  황학루가 ‘황학’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유는 원래 건물이 황곡기(黃鹄矶)에 지어졌는데, 후손들이 ‘곡’을 ‘학’으로 외정하다가 ‘황학루’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 다른 설은 ‘황학 선인’의 전설과 관련이 있다고도 한다. 이 곳은 원래 신(辛) 씨가 차린 술집이었는데, 한 도사가 천 잔의 은혜에 감사하며 떠나기 전 벽에 춤을 출 수 있는 황학을 그렸다고 한다. 그 후로 이 술집은 손님들로 붐비고 장사가 번창했다. 10년이 지나 도사가 돌아와 피리를 불자 그 황학은 벽에서 내려왔고 도사는 황학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신 씨는 이 선인을 기리기 위해 그 자리에 누각을 지어 황학루라는 이름을 붙였다.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최호(崔顥)는 황학루를 유람하러 왔다가 황학루의 선인 전설에 매료되어 고향을 그리워하며 <황학루>라는 시를 지었다. “오래 전에 신선은 황학을 타고 가버리고, 그 자리에는 황학루만 외롭게 남아 있네. 황학은 한번 간 뒤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고, 천여 년의 세월 동안 흰구름만 남아 있구나. 한양의 나무가 햇빛 속에 더욱 뚜렷하게 보이고, 앵무주는 풀이 더욱 무성하네. 석양을 바라보며 나의 고향은 어디에 있을까 생각하니, 강위의 자욱한 안개가 더욱 사람을 시름짓게 만드네.” 남송(南宋)의 유명한 시론가 엄우(嚴羽)는 <창랑시화(沧浪詩話)>에서 당나라의 칠언율시(七言律詩)에서 이 시를 으뜸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그 후 이백은 황학루에 올라 주변 경치를 둘러본 뒤 그 감상을 시로 남기려고 붓을 들어 막 시를 쓰려고 하다가 앞쪽에 걸려 있는 최호의 이 시를 보게 되었다. 이 시를 한참 보고 있던 이백이 “눈앞에 훌륭한 경치가 있지만 쓸 수가 없네, 이미 최호가 이 경치를 모두 써버렸다네(眼前有景道不得,崔颢题诗在上头)” 라고 하며 붓을 던졌다는 전설도 있다.

  중국 고대 제1각-등왕각

  당나라 때부터 지금까지 1000년이 넘는 긴 역사 속에서 살아남은 고건축물은 많지 않으나 등왕각처럼 화재, 홍수, 전란, 자연붕괴, 28번의 파괴, 29번의 건축을 거치며 다사다난한 건물도 드물다고 할 수 있다.

  등왕각의 모든 중건은 시대의 낙인을 찍었다. 당나라 때의 웅장함과 화려함, 송나라 때의 상하 3층, 원나라 때의 단단함, 청나라 때의 검은 기와 나무 기둥… 각 왕조의 등왕각은 각기 다른 양식으로 나타났는데, 마치 한 사람이 판이한 전생과 현생을 거친 것과 같다.

  등왕각은 장시성 난창시에 있다. 당나라 정관(貞觀) 연간에 당고조(唐高祖) 이연(李淵)의 아들이자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의 동생인 이원영(李元婴)이 산동 등주에 봉해져 등왕(滕王)으로 불렸고, 등주에 등왕각을 세웠다. 이원영은 훗날 강남 홍주(지금의 장시성 난창시)로 자리를 옮겼다가 고향이 그리워 다시 등왕각을 지었다.등왕각은 고대에는 상서로운 풍수 건축물로 여겨져 ‘등단호로전, 탑비예장잔(藤斷葫蘆剪,塔圮豫章殘)’이라는 옛말이 있다. 등왕각과 승금탑(繩金塔)이 무너지면 예장성의 인재와 보물이 모두 사라지고 도시가 무너져 번영하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또한 “만수궁에서 재물을 빌고, 등왕각에서 복을 빈다(求財萬壽宮,求福滕王閣)”는 말도 있다. 그리고 봉건 사대부들은 여기서 손님을 맞이하고 연회를 베풀어 시를 짓고 사를 지으며 등불을 구경하는 것을 즐겼다.

  이들 시사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으로 <등왕각서(滕王閣序)>를 꼽는다. 서기 676년, 당나라 시인 왕발(王勃)은 홍주를 거쳐 연회에서 즉흥적으로 <등왕각서>를 창작했는데, 이 중 ‘저녁노을은 짝 잃은 기러기와 나란히 날고, 가을 물빛은 높은 하늘과 같은 색이다(落霞與孤鶩齊飛,秋水共長天一色)’는 유명한 시구가 후세에 잘 알려져 영원한 고전이 되었으며, 등왕각도 그로 인해 후세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왕발의 <등왕각서> 이후 당나라의 왕서(王緒)는 <등왕각부(滕王閣赋)>를, 왕중서(王仲書)는 <등왕각기(滕王閣記>를 지어 ‘삼왕기등각(三王記滕閣)’의 미담으로 전해졌다. 후대 문학가 한유(韓愈)가 또 <신수등왕각기(新修滕王閣記)>를 지었다. 이로써 왕발, 한유 등은 시문전각(詩文傳閣)의 효시를 세웠고, 훗날의 문인 학사들이 등각하여 시를 짓고 글을 짓는 것을 답습하여 풍습이 되었다.

편집:董丽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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