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래각, 어찌 ‘인간세상의 선경(仙境)’이 되었을까?

From:금교Author: 2024-06-21 14:17

 ‘인간세상의 선경(신선이 산다는 곳, 경치가 신비스럽고 그윽한 곳)’을 언급하려면 상고시대의 신서 <산해경>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서적에는 ‘봉래산은 바다에 있다’는 구절이 나온다. 그래서 봉래는 전설의 바다 속의 3대 선산(仙山, 신선이 산다는 산) 중 하나가 되었으며, 그 이후로 자오둥반도의 북단에서 신비로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일찍이 2200여 년 전 천고일제(千古一帝) 진시황(秦始皇)은 불로초를 구하러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우연히 바다와 하늘 끝에 붉은 빛이 떠다니는 것을 보고 전설 속의 선산 봉래를 찾은 것으로 착각하였다. 후에 위세 당당한 한무제(汉武帝)가 여러 번 선인을 방문하려고 ‘동순해상(東巡海上)’을 했는데 결국 찾지 못해 낙담하여 사람에게 그가 바다로 나간 곳에 성을 지으라고 명하여 ‘봉래(蓬萊)’라고 이름지어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이 작은 성은 바로 오늘날 산둥성 펑라이시다. 이 전설 덕분에 봉래라는 ‘바다 속의 선산’의 화신이 현실에서 생겨났고 심지어 후대에 수많은 유명 문인들이 그 명성을 듣고 선경을 방문하거나 옛일을 회고하거나 여기에 찾아와서 헤아릴 수 없는 문화재를 남겼다. 그 중에 가장 유명한 곳은 도시의 북쪽 해변에 있는 단애산(丹崖山) 절벽에 자리잡은 봉래각이다.

 단애산에는 늘 해무가 끼어 있는데, 해무가 낄 때마다 봉래각과 산 전체가 해무로 둘러싸여 마치 신선이 사는 궁전과 같았다. 후에 여덟 선인이 바다를 건넜다는 신화가 곁들여져 이곳에 더욱 신비로운 색채를 더했다.

 신화에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점이 있지만 봉래각의 매력은 이런 감동적인 전설들뿐만 아니라 그 깊은 역사와 문화의 축적과 광활하고 호방한 산해풍경에도 있다.

 천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진 봉래각은 북송(北宋) 가우(嘉祐) 6년(1061년)에 세워졌는데 당시 등주(오늘날 산둥성 펑라이시에 위치함)의 군수 주처약(朱處約)이 당나라 어민들이 세운 용왕묘를 단애산의서쪽으로 옮기고 용왕묘가 있던 터에 봉래각을 세웠다. 이후 명·청 2대에 걸쳐 수건하거나 확장된 봉래각은 원림과 사찰이 뒤섞인 고대 건축물군으로 되어 중국 고대 4대 명루 중의 하나로 꼽히며 ‘강북 제1각’으로 알려져 있다.

 멀리 바라보면 누각과 정자가 산세를 따라 건축되어 있고 푸른 숲 속에 비치며 절벽 위에 높이 솟아 바다와 하늘과 맞닿아 장관을 이루고 있다. 봉래각 명승지는 삼청전, 여조전, 천후궁, 용왕궁, 미타사, 봉래각 등 여러 개의 다양한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봉래각은 높이 15m의 2층 목조건축으로 겹처마 팔각(八角)에 주홍색의 복도로 사방이 둘러져 있고 청나라 서예가 철보(鐵保)의 친필 현판이 걸려 있어 중후하면서도 화사한 느낌을 준다. 천혜의 지리적 환경으로 인해 사계절 내내 다양한 경치를 즐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루에도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른 아침, 관란정에서 붉은 해가 떠오르는 보면 노을빛이 눈부시게 비쳐져 장관을 이루며 황혼 무렵에 봉래각 아래서 거닐고 조석을 감상하면 시적인 정취가 가득 풍긴다.

 봉래에는 10곳의 선경이 있다고 전해지는데 신기루는 하나의 기이한 풍경이다. 매년 봄에서 여름으로, 혹은 여름에서 가을로 계절이 바뀔 무렵에 하늘이 맑고 바다가 잔잔한 날에 가끔 신기루가 나타난다. 북송의 과학자 심괄(沈括)은 <몽계필담(夢溪筆談)>에서 “등주의 바다에는 궁실, 누관, 성첩, 인물, 수레, 말, 관개의 모양과 같은 기운이 가끔 나타나는데 이를 해시(海市) 또는 운교신기(雲蛟蜃氣)라고 한다.”라고 이곳에 나타난 신기루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한 바 있다. 심괄이 신기루를 직접 보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동기의 대문호 소식(蘇轼)은 이를 목격하고 <등주해시(登州海市)>라는 시를 남겼다고 한다.

 이 두 사람뿐이랴. 수천 년 동안 명성을 듣고 찾아온 문인 묵객과 풍류 선비들이 끊이지 않아서 적지 않은 필묵의 아름다운 작품을 남겨 이 선각에 더욱 문화적 정취를 더했다. 봉래각 명승지를 걷다 보면 정자, 전당, 복도, 담벽에는 대련, 비문, 석표, 부러진 석비가 즐비하다. 천후궁의 앞전에 있는 초서 ‘수(壽)’자비가 특히 눈길을 끈다. 118세의 도가(道家) 선조 진원(陳抟)이 쓴 이 글씨는 힘차고 소탈한 모습으로 단숨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특이한 점은 이 ‘수’자가 부(富), 불(弗), 림(林)이라는 세 글자로 이뤄져 ‘숲을 잘 가꾸어 부유하고 장수하다’는 뜻으로 후세에 자연과 조화롭게 지내며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며 자연을 거스르지 말 것을 당부하는 것으로 그가 세상에 남긴 장수 코드이기도 하다. 봉래각과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피풍정과 와비정에는 귀중한 서예 석각이 적지 않다. 피풍정에는 각석(刻石) 25방이 있는데, 이 중 9방은 등주의 군사지도자였던 원가립(元可立)의 <관해시(觀海市)>시인데 위에 글씨는 명나라의 서예가 동기창(董其昌)이 지은 것으로 주련벽합(珠联璧合)의 작품이라 칭송할 만하다. 와비정에는 소식의 손글씨가 남아 있어 귀중하며 와비 앞면에는 행초(行草)인 <제오도자화(題吳道子畵)>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소식의 명작인 <등주해시> 시가 있다. 봉래각에는 소식의 손글씨뿐만 아니라 소식을 기념하는 소공사(蘇公祠)도 있어 후세 사람들이 참배할 수 있다.

 봉래각은 구조가 정교하고 질을 때 못이나 연결고리를 박지는 않았지만 단정하고 중후하며 대범해 보인다. 청나라의 문학자 유악(劉鹗)이 <노잔유기(老残游記)>에서 묘사한 바와 같이 ‘이 누각은 화동(畫棟, 그림을 그린 마룻대)이 구름 위로 날아올랐고 주렴(珠帘, 오색 구슬이 꿰어진 커튼)을 걷어 올리면 비를 볼 수 있어 매우 웅장하고 아름답다.’ 봉래적의 당대 유명 작가 양숴(楊朔)도 산문 ‘해시(海市)’에서 “당신이 누각에 기대어 바라본 바다와 하늘의 망망하고 맑고 푸른 경치는 사람의 오장육부를 깨끗하게 씻어 줄 것”이라고 감정을 글에 담아냈다.

편집:董丽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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