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움이 가득한 고대의 캠핑

From:금교Author: 2023-07-19 14:23

 최근 몇 년 동안 캠핑은 계속 유행되어 점차 중국 젊은이들의 새로운 생활 방식이 되었다. 때마침 주말을 맞이하여 친구들 또는 가족과 함께 소란스러운 도시를 벗어나 산과 들로 나가 모닥불을 피우고 커피나 좋은 술을 들고 밤하늘의 달과 별을 감상하며 즐거움을 만끽했다.

 그러나 산수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에 있어서 우리의 선조들이야말로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캠핑은 결코 현대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고대의 유목민족부터 사방을 떠돌아다녔던 방랑 시인, 사냥터에서 사냥에 열중했던 황제까지, 선조들은 일찍이 그 즐거움을 발견하고 캠핑 장비를 발명해 냈는데 그럼 선조들이 발명한 장비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옛사람의 생활에 녹아든 천막

 천막은 캠핑의 영혼으로 여겨진다.‘물과 풀을 따라 사는’유목민족에서 행군하는 군인까지, 천막은 옛사람들의 생활양식에 녹아들었으며, 이를 통해 많은 전고(典故)가 생겨났는데, 예를 들어‘운주유악(運籌帷幄)’에 나오는‘유악’은 사실‘천막’이었다. 한(漢)나라 때는‘악장(幄帳)’이라 했다.

 고대 귀족들이 캠핑을 할 때 사용했던 천막은 구조의 복잡성이나 재질의 우수성 모두 현대를 압도했다. 서한(西漢)의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묘에서 4벽 조임식(四阿式) 직사각형의 천막이 출토된 바 있다. 이 천막에는 102점의 크고 작은 유금(鎏金) 구리 부품들이 있는데, 각각 1, 2, 3등 표시를 해 14종류의 구조물로 조립하기 편리하다. 천막에 기둥을 설치하지 않고 상단 덮개는 트러스 구조로 되어 있으며 구리 부품 공정은 홈 스냅 결합, 벨 스피곳 이음, 접힘 및 핀 홀 고정의 형태를 채택하여 구조가 견고할 뿐만 아니라 분해 및 조립이 편리했다.

 사공극(謝公屐)을 신고 청운제(青雲梯)에 오르다

 발바닥에 바람이 나는 듯 빨리 걷게 해주는 등산화 한 켤레는 야외 비경을 탐구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

 다. 고대 동진(东晋)시대 시인 사영운(謝靈運)이 첫 등산화를 발명했는데, 그는 시를 잘 지었을 뿐만 아

 니라 베테랑‘배낭여행객’이기도 했다. 큰 산과 유명한 강을 자주 돌아다녔기 때문에 걷기 편한 등산 전용 아웃도어 신발인‘사공극’을 발명하게 됐다.

 ‘사공극’은 초창기에는 두 가지 제품이 있었다. 하나는 앞쪽이 낮고 뒤쪽이 높은 상산화(上山鞋)이었고, 다른 하나는 앞쪽이 높고 뒤쪽이 낮은 하산화(下山鞋)였다. 산에 오를 때는 상산화를 신고 내려올 때는 하산화를 신었다. 이것은 비록 등산객의 힘을 덜어주는 트렌디한 제품이었지만 매번 등산할 때마다. 신발 두 켤레를 챙겨야 하는 것은 여전히 불편한 점이었다.

 이에, 사영운은 신발 밑창의 앞뒤 바닥에 각각 홈을 내고 앞뒤‘못(鞋楔)’을‘굽(鞋齒)’으로 바꿔 앞뒤 신발 홈에 끼워 넣어‘사공극’을 개량했다. 언덕을 오를 때 앞면의 나무굽(木齒)을 제거하면 발 뒤꿈치를 단단히 잡아 미끄러짐을 방지할 수 있고, 산을 내려올 때 뒷굽(後齒)을 제거하면 앞굽(前齒)이 브레이크가 되어 넘어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다.

 ‘사공극을 신고 청운제에 오른다. 산기슭에 달하니 운해 사이로 해가 보이고 수탉 우는 소리가 하늘에서 울려 퍼진다(腳著謝公屐,身登青雲梯。半壁見海日,空中聞天雞)’는 이백(李白)의 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등산화는 당(唐)나라 때까지 줄곧 인기를 끌었다.

 오늘날까지 목극(木屐, 나막신)은 여전히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이런 풍습은 일찍이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전해져 뿌리를 내리고 일본 전통 복식 문화에 녹아 들어 유행을 쫓는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잡았다.

 고대의 만능 물품‘현장(玄奘) 배낭’

 ‘도보여행의 선구자’하면 현장법사(玄奘法師)라 할 수 있고 그가 등에 짊어진‘경급(經笈)’은 야외용 배낭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대나무 거치식 배낭은 트렁크처럼 공간이 충분해 소지품을 모두 넣을 수 있었다. 더 놀라운 점은 이것이 자체적으로 밖에 걸 수 있는 방식으로 제작되어 밖으로 뻗은 대나무 틀이 머리까지 뻗어 있어 우산을 덧대면 비바람을 막을 수 있었다. 심지어 작은 등잔까지 걸 수 있어 밤에도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이후, 옛사람들은‘현장 배낭’무게를 줄이기 위해 등나무 소재를 대나무로 변경하여 더 가볍고 견고하며 수납력이 좋은 배낭을 개발했다. 이것이 바로 송나라 문인과 선비들의 나들이‘히트 상품’인‘유산기(遊山器)’다. 송(宋)나라의 재상 부필(富弼)이 일찍이 시인 문언박(文彥博)에게 선물했는데 문언박은 자신이 아끼는 음식, 술, 문방묵보(文房墨寶), 심지어 다기세트까지 모두 그 안에 넣을 수 있는 것을 보고 감동하여‘상공께서 송산 유람 때 메는 가방을 하사하셨다. 각종 그릇, 물통, 술잔, 찻잔이 모두 들어가고도 남는다(上公遺我遊嵩具,匝盥杯盂色色全).’라는 시 한 수를 지었다.

 식합(食盒) 속의 건곤(乾坤)

 캠핑에는 자연히 음식이 빠질 수 없는데, 이럴 때 고대 식합이 유용하게 쓰였다.

 고대인들은 심지어 음식의 종류에 따라 특별한 상자를 선택하기도 했다. 만약 과일, 견과류만 간식으로 넣어 식욕을 달래려면, 칸이 달린 찬합(攢盒)이 가장 좋았고, 음식을 따로 담아 보온, 단열, 깨끗하고 위생적으로 하려면 궁중 및 민간에서 즐겨 사용하는 봉합(捧盒)을 선택했다. 제합(提盒, 손잡이가 있는 찬합)은 맛있는 음식을 겹겹이 배치하는 기구로 재질은 대부분 자단(紫檀), 황화리(黃花梨, 강향단) 계시목(雞翅木), 산지(酸枝) 등으로 집안 형편에 따라 모양이 제각각이었다. 명(明)나라 운사(雅士) 고렴(高濂)은 한때 제합을 직접 만들었는데, 아래층에는 작은 공간을 만들어‘술잔 6개, 술주전자 1개, 젓가락 6벌, 권잔(勸杯, 술을 권하는 데 특별히 사용되는 잔으로 크고 정교하게 만들어진다) 2개를 담을 수 있다.’ 윗층에는 6칸으로 나누어‘그중 4칸은 접시 6개를 넣어 과일, 술 등을 담고, 또 다른 두 칸은 각 칸에 4개의 접시를 놓고 생선, 음식, 젓가락을 담는다.’

 고대에도 존재한 접이식 테이블과 의자

 사람들이 나들이를 할 때 곳곳을 돌아다니기 때문에 접을 수 있고 수납이 용이한 작은 가구는 사람들에게 더 편리하고 즐거운 나들이가 가능하게 해준다. 옛사람들도 이미 이러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 것으로 보인다. 이를 증명할 수 있는 가장 전형적인 예가 바로‘호상(胡床)’과‘교의(交椅)’다.

 호상은 침대가 아닌 접이식 의자 형태의 좌구(坐具)이며, 등받이가 있는 것은 교의라고 했는데 이것은 오늘날 캠핑의 필수품인‘커밋(Kermit) 체어’와 유사하다. 둘 다 접거나 펴서 바로 앉을 수 있어 휴대가 용이하고 가벼웠다.

 그렇다면 고대에도 접이식 테이블이 있었을까? 명나라 사람들은 이미 이것을 사용하고 있었다. 만력(萬歷)시기 고렴의 <준생팔전(遵生八箋)>에‘접고 펼 수 있고 휴대가 용이한 접이식 테이블로 연회석에서 접대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매우 가벼운 이 휴대용 테이블은 특히 사냥터에서 사냥한 음식을 차려 먹는 데 적합하여 청나라 황제들에게 인기가 높아‘사냥테이블’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편집:董丽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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