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에서의 중국
From:금교Author: 2023-07-19 13:52
만 리(萬裏, 아주 먼 거리)에 걸쳐 펼쳐진‘실크로드’는 동서양의 경제, 정치, 문화교류의 중요한 도로를 만들었다. 로마제국 시기의 유럽에서는 중국인을‘비단을 가진 사람’이라고 불렸으며, 또한‘해상 실크로드’에서는 중국의 도자기 및 발명품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오늘날의‘실크로드’는 새로운 이념과 함의가 부여받았으며 지구상에 흩어진 황금목걸이처럼 세계 각지를 연결하여 전 세계의‘프렌즈 서클’을 구축했다.
비단으로 짠‘육상 실크로드’
기원전 114년부터 서기 127년까지 서한(西漢)의 외교가 장건(張騫)은 비단 무역을 매개로 중국과 중앙아시아, 중국과 인도 사이의 판로를 개척했으며, 그 후 1세기 이상의 노력 끝에 마침내 아시아와 유럽 대륙을 가로지르는 이 장삿길이 안정되어‘실크로드’로 불리게 되었다.
전통적인‘육상 실크로드’는 중국 고대 도읍지인 장안(長安)에서 시작하여 중앙아시아 국가, 아프가니스탄,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을 거쳐 지중해에 도달해 로마를 끝으로 총 길이는 6440km에 이른다. 이 길은아시아와 유럽의 고대 동서양 문명을 잇는 길로 여겨진다.
‘실크로드’가 개척되기 전에는 산발적이고 우연한 물적, 문화적 교류가 있었지만 개척된 후에야 비로소 이 지역의 무역은 국가의 행위로 표현되었고 연속적이면서도 큰 규모를 가게 되었다.‘실크로드’에서의 무역을 관할하기 위해 한(漢)나라는 기원전 60년에 서역도호부(西域都護府)를 설치했으며, 당(唐)나라는 서기 640년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 702년에 북정도호부(北庭都護府)를 설치했다. 따라서 중국은‘실크로드’를 개척했을 뿐만 아니라‘실크로드’무역에 대한 안전의 보장 및 분쟁의 처리도 실시했다.
‘육상 실크로드’에서 비단은 가장 대표적인 화물이었다. 우즈베키스탄 아프라시압 유적의 벽화에는 비단과 누에고치를 든 중국 상인이 그려져 있으며, 그리스 출신 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지(Geographica)>라는 책에서는 실크가 많이 생산된 중국을 가리키는 새리카(Serica, 실크의 나라)가 기술되어 있다. 이 비단들은 중국에서 멀리 서쪽으로 판매되어 간 것이 분명하다.
물론 실크뿐만 아니라 실크 기술도 외국에 전해졌다. 당나라의 여행가 두환(杜環)이 <경행기(經行記)>에 기록한 바에 따르면 그는 751년 대식(大食, 옛날 아랍국가의 총칭)에 가서 중국의 하동인(河東人) 뤼례(呂禮) 등이 그곳에서‘낙(絡)’을 짜는 것을 목격했는데, 낙이 바로 비단이었다고 했다. 이는 당시 비단이 대량으로 외국으로 전해졌을 뿐 아니라 비단을 생산하는 노동자들도 아랍 국가로 이주했다는 근거가 된다.
‘해상 실크로드’의 휘황찬란한 기억
‘해상 실크로드’는 성당(盛唐) 시대에 번영했다. 당시‘해상 실크로드’의 시발점은 광주(廣州)였다. 이곳에서 말라카해협을 거쳐 인도양으로 진입했으며 인도, 실론(스리랑카의 옛 명칭)을 거쳐 다시 서쪽의 페르시아만, 아덴 및 홍해로 진입해 서부로 가는 통로와 신라 및 일본으로 가는 통로를 연결했다. 당나라는 외국 선박의 출입과 세금을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관직인‘시박사(市舶使)’도 설치했다.
송(宋)나라 때 중국 상선은 페르시아만에서 지금의 오만 도파르 주를 거쳐 아덴, 나아가 동아프리카 연안에 도착할 수 있어 해외 무역도 더욱 발전되었다. 당시 화폐의 유출이 날로 늘어나자 이를 막기 위해 1219년 남송(南宋) 정부는 외국산 수입품을 비단과 도자기로 교환하도록 명령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인해 중국 비단과 도자기는 해외로 흘러가는 수량이 날로 늘어나고 범위도 더욱 넓어졌다. 최근 몇 년 동안‘해상 실크로드’의 항로를 따라 동쪽에서는 일본, 서쪽에서는 동아프리카 해안까지 다량의 송나라 도자기와 동전이 출토되었다. 이에 어떤 이는 당시의‘해상 실크로드’를‘해상 실크﹒도자기로드’라고 부르기도 했다.
당송 시대에는‘해상 실크로드’가 크게 발전하면서 상선이 많이 왕래했다. 배에 실린 화물은 도자기나 비단 같은 무역품과 더불어 서적도 주요 상품 중 하나가 되었다.
<일본문덕천황실록(文德實錄)>에 따르면 서기 868년 후지와라 가쿠슈는 태재부에서 당나라 화물을 검사할 때 당나라 원진(元稹)과 백거이(白居易)의 시문집인 <원백시필(元白詩筆)>을 받았다. 서기 881년 당나라 상인 장몽(張蒙)은 일본에 없었던 불교 전적 120여 권을 일본 승려 원진(圓珍)에게 전했다.
또한 나침반, 화약, 제지, 활자 인쇄술과 같은 중국의 발명품도 아랍, 페르시아 및 기타 국가의 상인을 통해 이 항로를 따라 유럽으로 전해졌다.
번영한 해외 교류는 항해사를 탄생시켰다.
원(元)나라 항해가 왕대연(汪大淵)은 서기 1328~1339년 두 차례에 걸쳐 12년간 원양항해를 했으며, 그의 <섬이지략(岛夷志略)>에는 100개 국가와 지역만이 이름을 올렸지만 실제 도달한 지역은 220개나 되었다.
1405~1433년 명(明)나라 항해가 정화(鄭和)는 7차례 선단을 이끌고 30여 개국에 도착했다. 남중국해를 거쳐 말라카 해협을 지나 인도양으로 건너가 인도 남부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아라비아해로 진입하여 페르시아만, 홍해, 아프리카 동해안으로 가거나 스리랑카 남단에서 몰디브 제도를 거쳐 동아프리카 연안으로 직항했다. 정화 선단의 대규모 원양 항해는 명나라와 아시아 및 아프리카 대륙의 많은 국가 및 지역 간의 관계를 구축하고 중국의 해상 교류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신 시대의‘실크로드’
21세기에 이르러 중국은‘실크로드’를 새롭게 해석했다.
2013년 시 주석은 카자흐스탄과 인도네시아를 방문했을 때‘실크로드’정신을 계승하고 개방적이고 협력적인 플랫폼을 구축하여 여러 국가의 공동 발전과 번영을 위한 새로운 동력을 제공하기 위해‘실크로드 경제벨트’와‘21세기 해상 실크로드’를 공동으로 건설하자는 주요 제안을 제시했다.올해는‘일대일로(一帶一路)’이니셔티브가 발표된 지 10주년이 되는 해로, 그 얻은 성과가 크고 풍부하다고 할 수 있다. 현재‘일대일로’는 전 세계 약 2/3의 국가와 32개 국제기구의 승인을 받고 협력 문서에 서명했다.
파나마는 중국과‘일대일로’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한 최초의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해 국가이며, 간린(甘林) 주중대사는 많은 국가들이‘일대일로’를 통해 철도, 공항 등 인프라의 발전을 실현했다며‘일대일로’는 각국에 협력적 플랫폼을 제공했으며‘연결성(連通性)’이 바로 그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국가발전개혁위원회‘일대일로’건설촉진센터 주임인 자이둥성(翟東升)은 10년의 성과를 5가지로 요약했다. 즉 신뢰할 수 있는‘프렌즈 서클’을 구축했고, 글로벌 상호 연결의 네트워크를 강화했으며, 경제무역 인문교류 협력의 교량을 재구성했고, 글로벌 거버넌스 시스템 건설과 개혁에 조력했고, 중국 대외개방의 폭과 깊이를 크게 향상시켜 전면적인 대외개방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형성을 촉진했다.
지난 10년 동안‘일대일로’의 그림은 점차 펼쳐져 기본 틀 위주의 사의화에서 세부 사항에 중점을 둔 공필화로 전환되었으며, 새로운 단계에서‘일대일로’가 어떻게 하면 국가 발전과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시대의 물결과 같은 주파수로 공명할 수 있을지는 논의할 가치가 있는 문제다.
이와 관련하여 베이징대학교 국제관계대학 교수이자 베이징대학교 지역 및 국가별연구원의 자이쿤(翟崑) 부원장은 향후 10년 동안 새로운 시태와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일대일로’참여국이 필요로 하는 발전 모델을 찾는 것인데 그것은 코로나19 퇴치 후 세계의 지속 가능한 발전 모델로 도시 발전의 공업화, 산업화, 저탄소화, 정보화, 디지털화, 민생화 및 국제화를 포함하며 새로운 발전의 요구사항을 충족시키는 새로운 발전 모델을 형성해야만‘일대일로’의 핵심 경쟁력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다고 했다.
편집:董丽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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