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신궁등(長信宮燈): 천 년의 시간을 초월한 문화의 보물

From:금교Author: 2025-03-17 10:32

 2025년 초, 톈진 박물관은 한 편의 역사적인 전시를 맞이했다. 바로 허베이성 박물관의 보물인 ‘장신궁등’이 이곳에 전시되었기 때문이다. 한순간에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이 박물관은 관람객들로 북새통을 이루었고, 사람들은 ‘중화 제일 등’이라 칭송받는 한(漢)나라 시대의 청동 등불을 직접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역사의 풍운 속 장신궁등의 전설

 장신궁등은 기원전 151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지금으로부터 22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이 장신궁등의 초기

 소유자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오랫동안 논란이 이어져 왔다. 등불에는 9곳의 명문이 새겨져 있으며, 총 65자의 글귀 중 6곳이 ‘양신가(陽信家)’라는 문구를 포함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양신’이 바로 한나라의 양신이후(陽信夷侯) 유계(劉揭)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당시 유방(劉邦)이 세상을 떠난 뒤, 태후 여치(呂雉)가 권력을 잡고 있었는데, 여씨의 세력으로 인해 한나라 왕조가 거의 뒤집힐 뻔했다.

 이후 태위(太尉, 옛날 중국 무관의 최상위 벼슬자리) 주보(周勃)를 중심으로 한 보황파(保皇派)가 여씨 외척 세력을 진압했는데, 유계는 이 왕조 보호한 핵심 인물로서 ‘양신후(陽信侯)’라는 칭호를 받게 됐다. 왕공 귀족들이 위세를 자랑하던 그 시절, 집안에서 위엄 있는 등불을 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며, 아마도 이 금박이 입혀진 청동 등불이 바로 그때 유계의 집에 놓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수년 후, 오왕(吳王) 유비(劉濞)가 ‘칠국의 난(七國之亂)’을 일으켰고, 유계의 아들 유중의(劉中意)도 이 난에 가담했다. 반란이 진압된 후, 유중의는 처벌을 받고, ‘양신가’의 모든 재산은 몰수되었는데, 그 중에 장신궁등도 포함되었다. 그 후 등불 받침에 추가된 ‘장신궁’ 세 글자는 이 등불의 행방을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장신궁은 당시 한나라 경제(景帝) 유기(劉啓)의 어머니인 두이방(窦漪房)이 거주했던 궁전이었으므로, 이 등불은 후에 두태후(窦太後)에게로 넘어갔으며, 그 이름 역시 여기서 유래되었다.

 후에 두태후는 장신궁등을 본인의 친족인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부인 두완(窦绾)에게 하사하였다. 두완이 사망한 후, 이 등불은 그녀의 묘에 함께 묻혔고, 1968년까지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 궁등은 마치 역사의 증인처럼 서한(西漢)의 궁중 권력의 변화와 가문의 흥망을 지켜보며 수차례 주인이 바뀌었으며 그 속에는 수많은 은원과 사연이 얽혀 있다.

 세계를 놀라게 한 보물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다

 장신궁등의 고고학적 발견은 그 ‘신세’처럼 극적이고 우연적이다. 1968년 5월, 해방군의 한 부대가 허베이성 만청구 링산(陵山)에서 국방 작업을 수행하던 중, 우연히 거대한 구멍을 폭파하면서 하나의 대형 고분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를 알게 된 고고학자들이 급히 현장에 달려왔으며 당시 중국과학원의 원장이었던 궈모뤄(郭沫若)도 여러 차례 현장을 방문했다.

 이렇게 2000년을 묵힌 절세의 보물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고분은 바로 중산정왕 유승의 묘로, 그 규모는 엄청나 길이는 51.7미터, 가장 넓은 곳은 37.5미터, 최고 높이는 6.8미터에 달하며 전체 용적은 약 2700입방미터에 이른다.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유물만 해도 1만 점이 넘으며, 그 중 금은기(金銀器), 옥, 청동, 철기 등의 귀중한 유물이 4000점 이상, 각종 청동등이 19점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세계적으로 유명한 ‘중국 최초의 금줄옥의(金縷玉衣)’가 유승의 무덤에서 발견된 것이며 장신궁등은 유승의 아내인 두완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두완의 무덤에서 장신궁등이 발견되었을 때, 그것은 이미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 이유는 두완 무덤의 주실이 양쪽 경사로 형성되어 있어 구조적으로 그다지 튼튼하지 않았고, 주실 동쪽 천장이 무너져 원래 제단 위에 놓여 있던 장신궁등이 떨어져 부서졌기 때문에 등불의 부속품인 머리 부분, 등받이, 등갓 등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다행히도 전문가들의 세심한 복원 작업 덕분에 장신궁등은 다시 한 번 그 우아하고 화려한 빛을 되찾았다.

 고대의 지혜와 미학이 완벽히 융합된 장신궁등

 장신궁등은 그 독특한 예술적 매력으로 ‘중화 제일 등’이라 불리며, 단순히 실용적인 조명 기구를 넘어서, 하나의 정교한 예술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형태적으로, 장신궁등은 높이가 48센티미터로, 전체적으로 한나라 궁중의 궁녀를 형상화한 모습이다. 그녀는 맨발로 앉아 고요한 표정을 지고 있으며, 왼손에는 등을 들고, 오른팔은 자연스럽게 위로 뻗어 있고, 소매 끝은 여유롭게 내려가 있다. 궁녀의 몸은 속이 비어 있는 구조로 되어 있어, 이는 등불의 무게를 가볍게 만들 뿐만 아니라 독특한 환경 친화적인 기능의 기초가 되기도 한다. 또한, 그녀의 머리와 오른팔은 분리가 가능하여, 일상적인 청소와 유지보수가 용이하다. 등갓은 두 개의 곡선형 청동 조각으로 이루어진 원형 구조로, 이를 좌우로 열고 닫을 수 있으며, 각도를 조절함으로써 빛의 밝기와 방향을 조절할 수 있는 매우 실용적인 디자인을 자랑한다. 넓은 소매는 교묘하게 등불의 상단 부분을 형성하여 연기와 열이 소매를 통해 등체 내부로 흘러 들어가면서 실내 공기를 오염시키지 않도록 돕는다. 이와 같은 환경 보호 개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놀라운 발상이다.

 공예적으로 장신궁등은 청동에 금박을 입힌 공예 기법을 사용하여,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황금빛을 자랑한다. 등불의 세부 묘사는매우 정교하게 처리되어, 궁녀의 얼굴 표정은 생동감 넘치고, 머리는 우아한 원형으로 높게 틀어올려, 고귀하고 단아한 모습이다. 그녀는 서한 초기의 유행인 곡저심의(曲裾深衣, 진한 시기에 매우 유행했던 옷자락의 곡선을 강조한 의상)를 입었는데 그 의상의 선이 부드럽고 자연스럽다. 목선과 소매 끝은 여러 층으로 나뉘어 있어, 옷의 주름이 선명하게 드러나는데 이는 서한 시대의 뛰어난 청동 주조 기술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장신궁등의 예술적 가치는 그 속에 담긴 문화적 의미에서도 드러난다. 서한 시대 궁중 문화의 축소판으로서, 이 등불을 통해 우리는 그 시대 궁중의 화려함과 번영을 엿볼 수 있으며, 당시 사람들이 추구한 미적 이상과 생활의 품격을 느낄 수 있다. 장신궁등은 그 자체로 역사적 기억을 담고 있으며, 시공을 초월해 2000여 년 전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다.

편집:董丽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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