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신춘(古韵新春),옛 선인들의 춘절(春節)의 모습

From:금교Author: 2024-02-18 13:46

 공연 보기, 선물 주기, 새해 인사하기, 맛있는 음식 먹기, 폭죽 터뜨리기, 도부 붙이기… 옛 선인들은 춘절(중국의 음력설)이라는 경축할 만한 중요한 순간을 어떻게 보냈을까? 옛 선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먼지투성이의 역사적 자료와 문헌을 열어 보고 얼룩진 유물과 기구를 만져보면서 고대 춘절의 충만한 의례감을 함께 느껴 보자!

 춘절을 축하하는 떠들썩한 장면은 일찍이 <시경(詩經)>에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면 <빈풍·칠월(豳风·七月)>에는 서주(西周) 초년 빈지[옛 지명, 지금의 산시(陝西)성 셴양(咸陽) 북쪽에 위치함] 사람들이 연말에풍작을 축하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서주의 춘절은 현재와 다르다. 이는 당시 통치자들이 풍작을 특히 중시했기 때문에‘춘절’의 시기를 풍작 후의 1개월, 즉 음력 10월 말과 11월 초로 정한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옛 선인들의 춘절에 즐길 수 있는 활동이 점차 풍부해지며 전문 무용수 가희와 곡예 공연자들이 등장하여 활기찬 문예 축제를 연출했다. 예를 들어, 서한(西漢) 시기의 한악무(漢樂舞)는 당시 새해를 축하하는 오락방식의 하나였다. <서경잡기(西京雜記)>에 기록된‘예장거, 비광수(曳長裾,飛廣袖. 긴 옷자락을 늘어뜨리고 넓은 소매가 나부낀다)’라는 구절은 한나라 무용수의 춤사위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또한, 현재 중국국가박물관에 소장된 서한 채회장수여무용(彩绘长袖女舞俑)은 곱게 빗은 긴 머리에, 안에는 깃옷을 입고, 붉은 색 나팔 모양의 예지포(曳地袍)를 걸치고 있는데, 이는 당시 무용수들의 의상인‘곡거심의(曲裾深衣)’의 특징을 재현하고 있다.

 성당(盛唐)으로 가보면 독창적인 궁중‘신년 음악회’가 옛 사람들에게 멋진 시청각적 향연을 선사했다. 그 중에서 당도무도여용(唐陶舞蹈女俑)과 당연주도용(唐演奏陶俑)은 아름다운 음악에 맞춰 날렵한 춤을 생동감 있게 선보였는데 이는 마치 그 시절 즐겁게 춘절을 쇠는 성대한 성황을 재현한 것 같다. 궁중 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특별한 공연예술 행사가 명절 분위기를 또 다른 절정으로 이끌었다. 예를 들어, 시안박물원에 소장된 당삼채도첩치기용(唐三彩陶疊置伎俑)과 당정간잡기용(唐頂竿雜技俑)은 당시 사람들이 묘회(廟會, 사찰 근처에 임시로 서는 장)를 둘러보고 곡예를 보는 떠들썩한 광경을 재현했다.

 ‘춘절을 쇨 때 연극을 본다’는 말이 있다. 청(清)나라의 문예활동에서 연극 관람은필수였다. 청나라 때, 연극 관람 시간은 통상 4~6시간이 소요되었는데 희곡 프로그램 리스트만 수록된 접본(折子)도 등장했다. 고궁박물원에 소장되어 있는 섣달 그믐 희목절(戲目折)이 전형적인 예다. 섣달 그믐 희목절 상단에는 공연 장소를, 희목절 하단에는 궁정 연극기구와 공연진의 이름을 적었다. 이에 희목절 기록에 따르면 희목절에는 섣달 그믐 당일, 수방재(漱芳齋) 후전(後殿) 금소옥수(金昭玉粹)에서 <승평제세(升平除歲)>를, 수방재 원내극장에서는 <복수영년(福壽迎年)>을, 건청궁(乾清宮)에서는 <금정주사(金庭奏事)> 등의 연극을 공연했다.

 춘절 동안 문예공연만 관람한다면 옛 선인들의 의례행사는 다소 단조로웠을 것이다. 명절 의례감을 중시했던 이들은 기발한 다른‘놀이’를 발명했다.

 먼저 선물을 주고 받는다. 예로부터 선물 주는 것을 중시해 온 중국에서 매년 명절에 선물 주는 것은 더더욱 빼놓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르코 폴로 여행기>에는‘춘절에 모든 귀족과 왕후(王侯), 백성이 서로 선물을 주고 받으며 한 해 동안 모든 일이 잘 되고 복을 많이 받기를 기원했다’고 쓰여 있다. 상서로운 의미를 지닌 물건들이 각광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후난(湖南)성 박물관에 소장된 원청화수조쌍어문절연판(元青花水藻雙魚紋折沿盤)이 있다. 수조쌍어문절연판 중앙에 놓인 주요 문양의 한 마리는 꼬리를 치며 위로 펄쩍 튀어 오르고 다른 한 마리는 수초 사이를 오가는 생동감 넘치는 물고기 두 마리로,‘해마다 풍요롭길 바라는(年年有余)’아름다운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선물을 주고 받는 것 외에도 옛 사람들은 춘절 기간 동안 서로에게 축복을 보냈다. 이들은 자신들의‘명함’인‘비첩(飛帖)’[일명‘명알(名謁)’또는‘명척(名刺)’]으로 축복을 전했다. 비첩에는 주인의 이름과 신분 뿐만 아니라‘인간세개, 천상성회, 공하신기엽길, 담지증상(人間歲改,天上星回,恭賀新祺葉吉,潭祉增祥)’과 같은 상대방의 복을 축원하는 세배 문구도 적혀 있어야 한다. <청파잡지(清波雜誌)>에는‘원우 연간, 신년 하례 때 왕왕 하인이 명척을 가지고 대신 갔다(元祐年間,新年賀節,往往使用傭仆持名刺代往)’고 기록되어 있다. 그후,‘비첩’의 등장으로‘세배할 때 집에 들어갈 필요없이 명함만 보내 사람들에게 인사 한다’라는 성대한 행사가 이뤄졌다. 여기저기서‘비첩’을 받기 위해 집집마다 붉은 종이로‘접복(接福)’이라고 적힌 새해 전용 우편함을 만들기도 했는데 이런 풍조는 명청까지 이어졌다.

 춘절 의례에 대해 말하자면, 아이들의 경우 세뱃돈을 받는 것이 의례였다. 옛날 세뱃돈은‘압승전(壓勝錢)’또는‘화전(花錢)’이라고 불렸다. 문헌에 따르면 압승전은 서한 시기에 탄생해 명청 시기에 성행했다. 시대가 발전하면서 그 용도는 점점 더 광범위해지고 내용과 종류도 더욱 풍부해졌다. 압승전의 앞면은 보통 네 글자의 덕담이 적혀 있었다. 이를테면, 복과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의‘복수강녕(福壽康寧)’‘장명백세(長命百歲)’‘금옥만당(金玉滿堂)’등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전시급제 축하와 관운형통을 뜻하는 압승전의 앞면에는‘장원급제(狀元及第)’‘지일고승(指日高升)’등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압승전 뒷면에 그에 호응하는 상서로운 뜻을 새긴 부조(浮雕) 문양이 있었는데, 복과 장수를 기원하는 압승전 뒷면에는‘송학도(松鶴圖)’‘수성도(壽星圖)’등 전통 문양이 새겨져 있었으며 전시급제 축하와 관운형통이라는 의미의 압승전 뒷면에는‘규성북두도(魁星北鬥圖)’‘여의도(如意圖)’등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압승전은 진정한 의미의 화폐가 아니라화폐로 유통할 수 없었으며 아름다운 소망과 축복을 담은 물건일 뿐이었다.

 또한, 섣달 그믐날 저녁 식사는 옛 선인들의 의례를 구현했다. 청궁당안(清宮檔案)에 따르면 건륭 49년(서기 1784년), 궁정의 섣달 그믐날 잔치에 돼지고기 65근(斤, 1근=500g)과 60여 가지 요리가 사용되었다. 민간에서 섣달 그믐날 저녁 식탁에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이 교자(餃子, 만두)다. 역사적으로 교자는‘교아(餃兒)’,‘편식(扁食)’,‘수점심(水點心)’,‘주보보(煮餑餑)’등으로 불렸다. 그 중, 신장(新疆) 투루판(吐魯番)지역에서 출토된 당나라 교자의 실물은 교자가 1000여 년 전에 서역 사람들 식탁의 진미였다는 것을 실증하는 것이다.

 옛 사람들은 비록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은 없었지만 가장 소박하고 진심 어린 축복으로 짙은 명절 분위기를 느끼고 의례감에 흠뻑 빠졌음을 알 수 있다.

편집:董丽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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