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 위에 쓰여진 ‘저우촌(周村) 이야기’
From:금교Author: 2023-07-07 16:07
실크로드의 시작점을 하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시안(西安)을 연상한다. 그 이유는 시안은 당시 장건(張騫)이 서역으로 출사했던 출발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안은 누에와 비단의 주요 생산지가 아닌비단의 집산지에 불과하다.
<사기(史記)>, <한서(漢書)>에는 누에실 방직업을 말할 때 ‘단언컨대 치루(齊魯, 지금의 산둥)이며 다른 곳은 이에 미치지 못한다.’라고 했다. 당나라 관수지서(官修誌書) <당육전(唐六典)>에는 ‘당(唐)대에 전국 양잠 방직업은 산동(山東), 하남(河南), 하북(河北), 사천(四川), 강남(江南)의 5개 지역에서 경쟁 국면을 보였지만 품질과 양에 산동 방직품은 모두 1위를 차지했다.’라고 쓰여 있다.
1934년, 경제전문지 <공상반월간(工商半月刊)>에 실린 <저우촌비단마업 조사(周村絲麻業調查)>라는 글에서는 전국시대 이후 제지(齊地, 지금의 산둥성)의 비단산업은 우릉(於陵)을 으뜸 지역으로 삼았는데, 우릉은오늘날 산둥 창산(長山)현의 저우촌진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동쪽으로 발해, 서쪽으로 운하와 인접한 저우촌은 이런 독특한지리적 위치로 인해 산둥과 중국 전역에영향력을 주었으며 비단무역이 발달한 상품의 집산지로 발전했다. 이러한 점은 ‘비단의 고장’으로 유명한 저우촌이 명실상부한 ‘비단의 발원지’라는 것을 강력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씨실과 날실로 천년 ‘금수(锦绣)’를 직조하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중국에서 최초로생겨난 견직물 중심지는 2500년 전 춘추(春秋)시대의 제나라.노(鲁)나라 지역으로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제나라 중심지역에위치한 우릉성은 제나라 견직업의 주요 생산지였다. 이곳에서 오랜 재배역사를 가지고 있는 뽕나무는 ‘신목(神木)’이라 불렸다. 현지 백성들은 풍부한 누에자원을 이용해 누에견직업을 대대적으로 발전시켰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빙완, 기수, 순리(冰紈, 綺绣, 純麗)’등 고급스럽고 정교한 견직물은 자급자족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량 수출이 가능했다. 국내를 비롯해 해외에서도 잘 팔려서 ‘천하 사람들의관대와 옷차림이 모두 제지에 의지한다(天下之人冠帶衣履皆仰齊地).’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당시 제나라 견직물이 눈부시게 발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한(秦汉) 시기 제지의 견직물은 품종이 많고 품질이 뛰어나 황실과 관청의 찬사를 받았다. 제나라에서 ‘삼복관(三服官)’을 설치해 매년 정교하고 아름다운견직물로 황실 궁정에서 사용하는 봄, 여름, 겨울의 삼계절 의상을 제작했다. 당나라 시대는 비단 제품은 장안으로 수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라시아 일부 국가까지 판매되었다. 동시에 재상(栽桑), 양잠(養蠶), 제사(製絲), 견직(絲織) 기술도 동쪽의 조선, 일본 등지로 전승되었다. 명청 시대에는 저우촌을 중심으로 한 비단 생산과 날염 기술이 크게 향상되어 산둥 경내에서 생산되는 누에고치와비단의 품질이 절대적인 우위를 점했다. 저우촌은 빠르게 중국 북방의 상업 요충지가 되어 수백 년에 걸친 전성기를 맞이했다.
훗날 자카드 문직기, 전력 견직기 등 신기술과 새로운 설비가 도입되어 생산효율이 크게 향상되었다. 특히, 1904년 저우촌이 개항후 당시 산둥 최대의 비단 생산과 무역 시장으로 부상하여 민족 견직물 기업들이 잇달아 생겨났다. 전국 유명 상호인 ‘서부상(瑞蚨祥)’을 열었고, ‘동방상인’이라 불리는 근대 유명 상인 맹락천(孟雒川)의 부친이 바로 저우촌에서 창업을 시작했다. 같은 시대에 저우촌에비단생산공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개발하는 회사가 생겼고 최초의비단기술 전문학교가 설립되었으며 저우촌은 비단생산과 과학연구 및무역에 있어 완전한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1930년대까지 저우촌 비단제품의 연간 생산량은 산둥성 전체의 89%를 차지했으며 제품은 중국의 절반 이상을 커버했다. 1939년 출간된 <현대본국지도(現代本國地圖)>에는 ‘저우촌 견직업이 번창했으며 견(绢), 추(绉), 주(绸), 능(绫)은 산둥에서 으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의 저우촌 길거리 구석구석마다 장식된 자카드 비단 원단,견직물화, 초목염색스카프 등 제품들은 전세계에 명성을 알렸을 뿐만아니라 오랜 기예는 전승되면서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었고 또한 세상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날실과 씨실로 천 년의 ‘금수’를직조한 도시 저우촌이 다시 닻을 올리고 출항을 시작하고 있다.
카이리(凯利)비단:
‘정직과 혁신’을 향한 사명
찬란한 중국의 견직 기예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단연 비단이다. 채색 진사 견직물화 <주촌팔경도(周村八景圖)>는 천연 누에실로 가장 전통적인 직물기예 및 가장 오래된 자카드 헤드와 북 기술을 운용해 정교하게 직조했으며 화면의 묘사가 섬세하고 세밀하며 입체감이 풍부하고 부드러운 먹빛이 뚜렷하다. 이것은 바로 쯔보카이리비단유한회사(淄博凱利絲綢有限公司, 이하 ‘카이리비단’이라고 함)가 저우촌 ‘천하제일촌’, 비단과 고대 상업도시 문화를 배경으로 완성한 당대 고급제품이고 중국 국내 뿐 아니라 세상에 없는 독특하고 독보적인 매력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저우촌 둥제(東街) 한 켠에 숨어 있는 카이리비단은 현지의 비단 라오쯔하오(老字号, 역사가 깊고 전통이 있는 상호)로 꼽힌다. 외부에서 바라본 공장의 모습은 1970~1980년대를 연상케 하는 낡은 분위기만 남아 있지만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마치 작은 비단 박물관에 들어선 듯 하다.
국가급 무형문화유산 비단 직물 염색 기예의 계승자이자 회사 책임자인 자이셴바오(翟先寶)가 “확대경으로 우리 직물화를 보십시오. 1cm 너비의 그림에 300개의 색실을 정밀하게 직조해 전통 기예와 현대 예술을 융합해 표현했습니다.”라며 “최초의 베틀 북 2개에서 현재 8개까지, 위밀(緯密, 직물이 단위 길이 내에서 통과하는 씨실의 개수)도 최초의 192개 실에서 지금의 300개에 일러 선명도가 더 높아지고 색상도 더 다양해졌습니다.”라고 소개했다.
자이셴바오는 1999년부터 카이리비단 회장을 맡아 쯔보 견직물 3공장의 70여년에 걸친 찬란한 역사를 이어갔으며 비단 장인들을 이끌고 새로운 비단 개혁과 생산의 길을 열었다. 그는 “저우촌 염직기예는 오늘날까지 발전하는 동안 누에실에서 하나의 완전한 작품을 만들기까지는 7개의 공정이 필요하며 매 공정마다 장인의 기예 수준을 시험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중에서도 직조는 가장 중요한 공정이다. 그는 “최근 몇 년 동안 우리는 노후화된 70년대 방직기의 설비 성능의 부족한 점에 대해 기술적으로 공략하여 전통 직기에 존재하는 단점을 극복하는 데 힘써 직물화 생산 창작의 품질과 다양성을 향상시켰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선진적인 기술개혁은 직물염색 무형문화유산 기예의 생명을 연장시켰으며 카이리비단의 견직물화를 수많은 비단 예술품 중에서 두드러지게 했다.
견직물화 시리즈 제품 외에도 천연 식물 염료로 가공하여 만든 방충, 살균, 스킨케어 미용 기능을 갖춘 초목염 실크 시리즈와 디지털 그라피티 기술을 적용해 생산한 디지털 그라피티 시리즈 등은 중국의 정교한 비단예술을 구현했다. 이뿐만 아니라 중대 회의에서 사회 각층 지도자가 국제 친구들에게 증정하는 고급 선물로 선정되었다.
2021년 6월, 카이리비단이 보호하는 ‘저우촌 비단염직기술 프로젝트’가 국무원에 의해 제5차 국가급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으며 비단염직 시리즈 제품도 업계에서 ‘명품’반열에 올랐다. 자이셴바오가 볼 때 계승은 기본이지만 비단문화가 지속해서 발전하려면 청년들의 전승 및 혁신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카이리비단은 산둥 경공직업학원, 산둥청년정치학원 등 학교와 적극적으로 협력해 많은 청년들이 비단산업을 이해하고 산업에 매진할 수 있도록 도왔다. 제품의 경우, 카이리비단은 문화크리에이티브와 장식분야에 주력해 개인형 맞춤화 서비스를 내놓았다. 자이셴바오는 “비단문화는 반드시 문화크리에이티브 및 관광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문화크리에이티브 제품을 개발하는 동시, 낡은 공장 건물을 개조하고 견직물 공업관광을 구축하여 관광객들이 저우촌의 견직물 문화를 더 많이 체험하도록 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다란팡: ‘5심(五心)’을 지키며,약속을
보물로삼고비단으로 국가를 흥하게 한다
얼마 전 열린 제3회 중국국제소비재박람회에서 쯔보 다란팡비단그룹유한회사(大染坊絲綢集團有限公司, 이하 ‘다란팡’이라고 함)은 중국 전통 길상 문양을 글로벌 트렌드와 결합해 자체 개발한 국풍국조 스카프 등 일련의 수공예품을 전시하고 선보이자마자 국내외 바이어들에게 크게 주목을 받았다.
‘다란팡’하면 사람들은 먼저 2003년 CCTV 인기 드라마 <다란팡>을 떠올린다. 장샤오광(张晓光) 다란팡 총경리는 “맞습니다. 우리는 바로 드라마 주인공의 그런 애국심을 지속적으로 발양해 저우촌 비단업 종사자들의 투지를 북돋으려고 합니다.”라며 드라마가 방영된 다음 날 ‘다란팡’을 등록했다고 말했다. 사실, 다란팡은 쯔보의 오래된 국유기업 네 곳을 기반으로 여러 차례 합병을 거쳐 2007년 재조직된 산둥성의 라오쯔하오다.
장샤오광은 저우촌의 한 비단 세가 출신으로 부모, 형수, 아내, 처가 모두 당시의 비단 산업 국영기업에서 요직을 맡고 있었다. 초반에 나염공장에서 시작하여 국영기업으로 바뀐 후, 그는 지금의 다란팡에 말단사원으로 입사해 총경리에 오르기까지 이곳에 근무하면서 자연스럽게 비단 산업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깊은 애정을 갖게 되었다. 장샤오광은 “비단산업은 우리의 민족산업이자 전통산업일 뿐만 아니라 해방초기 공화국에서도 인정한‘공훈산업’이기도 합니다.”라며“당시 국력이 약해 도자기, 비단, 찻잎 같은 것들을 외화와 교환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를 통해 당시 비단이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알 수 있습니다.”라고 소개했다.
개혁개방 이후 10년간 ‘섬유의 황후’라고 불리는 비단이 가장 대표적이고 외부의 이목을 끌 수 있는 업종 중 하나였다. 이후 국가의 경제체제가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넘어가면서 정부에서 첨단기술을 장려하기 시작했으며 비단업과 같이 노동집약적 전통산업은 이 영향으로 시장에서 대거 도태되었고 관련 노동자나 기술자들도 잇달아 전업을 하거나 그만두게 되었다. 이와중에 장샤오광은 이런 시황을 잘 버텨냈다.
비단 산업이 점점 더 과학기술화 및 현대화 과정에 진입하면서 다란팡도 각국의 선진 직조기계를 대량 도입해 비단 제조 능력과 수준을 지속적으로 향상시켰다. 시장 변화에 따라 과거 ‘저렴한 가격으로 이윤을 추구’하던 조방식 생산 모델을 바꾸고 연구 개발 메커니즘을 끊임없이 개선해 국내 비단업계에서 유일하게 제사(繅絲, 고치를 켜 실을 뽑음), 직조, 날염, 통염색, 가정용 패브릭 의류, 비단공예품 등국내외 무역의 완전한 산업사슬을 갖춘 비단 생산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또한 강북지역에서 규모 및 생산 능력이 가장 큰 비단 날염 생산 기업이기도 하고 공신부로부터 ‘제조업 단일 품목 우승 시범 기업’으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이미 많은 명성을 얻은 장샤오광은 혁신하는 과정에서“우리가 생산한 비단 제품은 기계 세탁할 수 있으며 내광성, 내마찰성, 염색 정착도 등 비단 지표가 모두 국제 선진 수준에 도달했습니다.”라고 말하며 자체 개발한 ‘구김 없는 비단’을 가장 자랑스러워했다.
현재, 알리바바에서 다란팡의 비단제품은 미국, 독일, 캐나다, 호주, 싱가포르, 일본 등 50여 개 국가와 지역에 판매되고 있으며 대외무역 수익은 기업 영업수익의 20~30%를 차지한다. 장샤오광의 다음 계획은 국풍국조의 요소와 현대적 디자인 이념을 서로 융합하여 더욱 중국적인 색채, 그리고 세계 트렌드에도 잘 맞는 비단제품을 만드는 것이다.
비단은 일종의 문화적 속성을 지닌 기호다. ‘눠바오쓰방(諾寶絲邦)’이라고 불리는 다란팡의 비단 브랜드는 영어 ‘NOBBY SERINDA’의 중국어 발음이며 ‘고귀한 비단의 나라’라는 뜻으로 ‘약속을 보물로 삼고 비단으로 국가를 흥하게 한다(以諾為寶,以絲興邦)’는 의미에서 인용한 것이다. 장샤오광은 “업계 선두 기업으로서‘초심, 장심, 전심, 항심, 혁신(初心, 匠心, 專心, 恒心, 創新)’을 고수하면서 수천 년간 이어온 저우촌의 비단 문화 전통을 계승해 나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편집:董丽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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