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존(何尊): 여기에 최초의 ‘중국’이 있다

From:금교Author: 2024-03-27 09:49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중화 문명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종종 ‘중국’이라는 이름이 어디에서 왔는지 묻곤 한다. 수 많은 전적(典籍)과 문물 중에서 과연 ‘중국’의 최초 출처를 찾을 수 있을까?

  여기 한 청동기가 3000여 년전의 해답을 제시해 주었다.

 겨진 겉면의 녹슨 흔적은 역사의 변천을 투영하고 깊이 숨겨진 ‘중국의 마음’을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바로 산시(陝西)성 바오지(寶雞) 청동기 박물원에 보관되어 있는 서주(西周) 초기의 청동기 하존이다.

 하존은 높이 38.8cm, 구경 28.8cm, 무게 14.6kg의 청동 주기(酒器)다. 전체적인 형상은 ‘아(亞)’자형으로 목이 길고 배부분이 약간 불룩하고 권족(圈足)이 높다. 몸통 옆면에는 네 줄기 투조한 동출 장식이 달려 있고 위에서 아래로 둥근 몸체가 네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주요 문양은 고부조(高浮雕)된 동물의 얼굴로 중앙에 위치하며 큰 눈과 날카로운 발톱을 가지고 있는 사나운 모습이다. 입 가장자리와 권족부 무늬는 각각 동물 모양의 파초 잎무늬와 비교적 간단한 얕은 부조 동물 얼굴 무늬다. 그릇 전체는 뇌문(雷紋)으로 장식되어 있고 일부는 3겹의 꽃으로 장식되어 있어 화려하고 장엄해 보인다. 원시 토템의 천진함, 악귀 같은 흉악함, 참어 같은 교활함, 푸른 소나무 같은 위엄, 검은 구름 같은 육중함을 지닌 하존의 전신에서 ‘사나우면서도 엄숙한 아름다움’을 풍긴다.

 하존의 발굴에 대해 말하자면 재밌는 일화가 있다.

 하존은 1963년 바오지시 자춘(賈村)진에서 출토되었다. 하존이 처음 발견됐을 때, 한 마을 주민이 집으로 가져가 식량을 담는 데 사용했다가 2년 후 폐품 매입소에 팔아 하마터면 폐기될 뻔했다. 마침 바오지시 박물관의 전문가가 보물을 찾기 위해 폐품 매입소에 갔고 하존은 30위안의 가격으로 전문가에게 다시 구매했다. 당시 하존 전체가 녹으로 덮여 있어 전문가들도 그것의 비범함을 발견하지 못하고 서주 시대의 청동존으로만 여겼었다.

 재난을 모면한 하존은 10년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내면의 건곤’을 드러냈다. 1975년 국가문물국이 베이징 고궁박물원에서 ‘전국 신규 출토 문물 전국 회보전(全國新出土文物汇報展)’을 개최하며 이 청동기는 베이징으로 옮겨져 전시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청동기의 표면이 심하게 부식되어 전시 전에 고궁박물원의 복원부로 보내져 녹을 제거했다. 표면의 얼룩덜룩한 녹을 제거하고 나니 하존의 안쪽 바닥 100c㎡에 새겨진 122자의 명문(銘文) 12행이 드러났다. 이 명문은 주왕(周王)이 낙읍을 창건하고 제2의 수도를 건설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명문의 대체적인 내용은 주왕은 성주(成周)에 도성을 만들고 무왕(武王)에게 큰 복을 비는 제사를 지냈다. 주왕은 병술일(丙戌日)에 경궁 대실에서 하(何)에 훈고를 했는데, 하의 선공(先公, 천자, 제후 선조에 대한 존칭) 공씨(公氏)가 문왕(文王)을 따르고 문왕은 하늘의 명을 받들어 천하를 통치했다. 무왕은 상(商)나라를 멸망시킨 후 이 곳을 천하의 중심으로 삼아 민중을 다스리겠다는 것을 하늘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고했다. 주왕은 하에게 패(貝, 고대의 패화) 30붕(朋)을 하사하였고 하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존(尊)을 만들었다.

 전문가들은 명문의 주왕은 주성왕(周成王) 희송(姬誦)으로 보고 있다. 당시의 희송은 겨우 10대였지만 이미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했으며 임종을 맞이한 부왕 희발(姬發)의 유지에 따라 당시 왕조의 도읍지에서 300여km 떨어진 낙양(洛陽)에 도시를 만들고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다. 주왕의 눈에 띄어 소견(召見,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불러 만나보는 것)된 서주의 귀족 하는 역시 젊은이였다. 그는 특별히 청동존을 주조했는데 존 바닥의 한정된 범위 안에 이 소견과 훈계를 기록했다.

 무엇보다 세계를 놀라게 한 것은 하존 명문에 나오는 ‘중국’이라는 두 글자다.

 연구에 따르면 ‘중(中)’과 ‘국(國)’자는 최초 모두 상형문자였다. ‘중’은 원래 부족민 소집을 상징하는 특수한 깃발이었다. 사람들은 모일 때 이 큰 깃발을 중심으로 둘러쌌다. 부락 중앙에 깃발이 휘날리는 것은 씨족의 상징이자 씨족 구성원들이 외출했다 귀가하도록 지시하는 방향이다. ‘중’은 이후 중앙, 중심, 가장 중요함 등의 의미로 확장되었다.

 ‘국’자의 번체 형식은 ‘國’이며, 중간의 구(口)는 사람을 대표하고, 구 아래의 가로획 일(一)은 사람들이 번식하는 땅을 나타낸다. 땅은 이처럼 중요하므로 반드시 사람들이 손에 병기를 들고 보호하며 마지막으로 성벽을 쌓아 방어해야 한다. 담으로 둘러 쌓여 있고 병기가 보호하며 인구가 살고 있는 땅, 즉 성을 고대에는 ‘국’이라 불렀다. 은상(殷商) 갑골문 복사(卜辞)에는 ‘중’과 ‘국’ 모두 함께 연용해서 쓰지 않았고 기원전 1038년에 주조된 하존 명문에 ‘중국’이 처음 등장한다.

 그러나, 여기서 ‘중국’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오늘날 의미하는 바가 아니다. 화하민족이 형성된 초기에 ‘중국’은 최초로 중앙의 성 또는 중앙의 국가라는 방위 구획상의 개념에 불과했다.

 문헌 전적 중의 ‘중국’은 <시경(詩經)> <상서(尚書)> <좌전(左傳)> 등에서 처음 발견되었으며 이런 전적들이 책으로 된 연대는 모두 비교적 늦다. 하존 명문 중 최초의 ‘중국’이라는 단어는 주왕조 통치자의 치국이념을 구현했을 뿐만 아니라 초기 ‘중국’개념의 형성과 발전과정의 핵심 부분을 상징하고 있다.

 최초의 의미는 다를지 모르지만 역사의 긴 강 속에서 ‘중국’이라는 글자는 지리적 중심, 정치적 중심에서 파생된 문화중심이라는 의미가 더욱 남다르다.

 진한(秦漢) 이래 중국이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통일국가를 형성한 후, ‘중국’이라는 단어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어 화하민족 위주로, 다민족이 거주하는 통일국가의 고유명사로 발전했다. 청(清)나라 말기에 이르러, ‘중국’이라는 글자가 정식으로 국명으로 사용되었고 공식 문서에도 등장했다.

 업계 사람들은 하존의 위대함은 명문 가치에 있으며, 단 두 글자로 ‘중국’의 문맥을 담고 있다고 여긴다. 하존에서 시작한 ‘중국’이라는 두 글자는 오늘날까지 발전해 오며 중국의 국토, 인구, 민족, 문화,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 안에 담긴 의의는 단순히 지리적 면적이나 지리적 좌표로 귀납될 수 없으며 나아가 살아 있는 국가와 민족의 발전사라고 할 수 있다.

 3000년 전, 한 줌의 황토가 청동존의 빛을 가두었다. 화하 후손들의 마음 속에 뿌리를 내린 문자 ‘중국’이 마음에 새겨져 있다. 3000년 후, 하존을 묻었던 흙과 이 흙이 연결된 960여만㎢의 땅은 ‘마음 속’에 새겨진 ‘중국’이라는 두 글자로 명명되었다.

편집:董丽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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